통도사 사찰의 홍매화는 아름다운 고목으로 손꼽힌다. 2월 중순 아직은 매화 꽃망울이 터지기 전에 산중의 낙엽 속에선 잔설을 뚫고 복수초福壽草 노란 꽃잎이 가장 먼저 꽃소식을 알린다. 3월로 접어들면 바람꽃 하얀 꽃잎과 노루귀가 다투어 핀다. 이맘때 전국의 사진가들은 어디에 무리지어 꽃이 피는지 남 먼저 알고 해마다 피어나는 꽃자리 찾아 산언덕으로 달려간다.
수도권 이북의 사진가들은 남쪽의 꽃소식에도 발걸음을 쉬이 옮기지 못한다. 길이 너무 먼 이유다. 조금만 기다리면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음이다. 수도권 주변에 가장 유명한 꽃자리는 인천부두에서 한 시간 남짓 뱃길로 가야하는 작은 섬 풍도豊島다. 풍도는 봄꽃이 어느 곳보다 많이 핀다. 부두에서 내려 20분 정도 낮은 산언덕을 올라가면 해풍에 길들여진 수많은 꽃들이 낙엽을 헤치고 다소곳이 무리지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고작 열흘 정도면 지고 말 솜털 뽀송한 꽃을 담기위해 주말이면 수백 명의 사진가들이 몰려든다. 꽃을 담기 위해서는 접사렌즈가 필수품이다. 봄꽃은 작은 꽃들이 많아 확대해서 드려다 봐야 제 맛이다. 손가락 한두 마디 작은 꽃들의 솜털 하나까지도 확대되어 눈 속으로 빨려 들어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봄꽃이 아름다운 건 기다림의 세월 때문이다.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지루한 여름 보다 한 겨울 참혹한 시간들을 참아낸 시간의 삭막함이다. 버리고 나서 텅 빈 세월을 묵묵히 기다린 상처, 그 아린 흔적 때문이다.
봄에 나는 나비의 무리/ 움직일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가만가만 어디선가/ 봄나비떼 소리가 들리고 있잖니, 풀벌레 소리가… (이은봉 ‘움직일 수만 있으면 돼’ 중에서) 기다린 세월 때문에 봄에는 그저 움직일 수 있음 그 자체가 행복이다.
풀아 내 작은 풀아/ 노을이 검게 너웃너웃거리는 것이/ 너의 그리움/ 꽃이 되는 그리움일랑/ 아예 잊었나 보다/ 너의 봄색은 어디서 오느냐… (오봉옥 ‘붉은 산 검은 피’ 중에서) 잿빛 무거운 대지가 연록 색으로 바뀌는 순간은 세상이 그리움과 사랑으로 피어난다.
눈 녹아 진무른 땅이 / 저만큼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서/ 자신의 무게만큼 흔들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겠다/ 나무가 온몸으로 세상의 바다에 닿으려고/ 봄빛 물결 반짝이며 아우성치는 소리 소리들… (김세윤 ‘나무 위에서’) 마른 가지에 새 순이 돋아나는 소리가 아우성치듯 시인의 귀에 들리는 날이 봄이다.
겨울은 머리 위에서 몸으로 고통을 느끼지만 봄은 몸으로 느끼는 따스함보다 마음으로 다가오는 따사로운 감정이 진정한 봄에 대한 느낌이다. 빌게이츠가 그랬지. Winter is on my head, but eternal spring is my heart.(겨울은 내 머리위에 있으나 영원한 봄은 내 마음속에 있다.) 그래서 봄이면 말하기 힘들어도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청춘이여, 사랑하지 않는 척 숨기고 살아가는 그대들의 떨림이 무슨 소용이랴. 봄이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 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가 봄이다.
내 나이 고희가 지나고 보니 문득 중국 당대 시인 두보杜甫(712~770)의 시가 생각난다.
朝回日日典春衣 조정에서 나오면 봄옷을 잡혀 놓고
每日江頭盡醉歸 매일 강 언덕에서 만취하여 돌아오네
酒債尋常行處有 가는 곳마다 외상 술값 있지만
人生七十古來稀 인생 칠십년은 옛부터 드문 일
穿花蛺蝶深深見 꽃사이 호랑나비 깊숙히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 강물 위에 점을 찍듯 잠자리 난다
傳語風光共流轉 바람 빛에 전하리라 함께 흘러가자고
暫時相賞莫相違 잠시라도 서로 잘 지내며 원망하지 마세
一片花飛減却春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
風飄萬點正愁人 수만 꽃잎 흩날리니 사람의 근심 어찌 할가
且看欲盡花經眼 지는 꽃 보고 어른거림 잠깐 사이려니
莫厭傷多酒入脣 서글픔 많다 말고 술이나 마시자.
江上小堂巢翡翠 강변의 작은 정자 비취가 둥지 틀고
苑邊高塚臥麒麟 궁원 큰 무덤에 기린 석상 누어있네.
細推物理須行樂 사물의 이치 헤아려 즐겨야 하리니
何用浮名絆此身 어찌 부질없는 이름으로 몸을 얽어 맬 건가
위의 시 두 편은 두보가 47세 때 곡강정曲江亭이란 정자에 앉아 봄에 지은 시들이다. 당시는 사람이 칠십을 살면 조정에서 청려장靑藜杖이란 지팡이를 하사할 만큼 장수인에 속했다. 두보 자신도 그 나이에 이미 노년이라 생각했었던 게 분명했을 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육십 대 이후는 모두 덤으로 사는 인생이 또한 분명하리.
봄이 오는 소리는 좀도둑에게도 희소식이다. 겨우내 잠겼던 창문을 열고 봄기운을 집집마다 느낄 때면 열린 창문으로 도둑들이 활개 치는 시기기도 하니 아이러니다.
-woojae-
제목: 봄이 오는 소리
글쓴이: 우재/尹中一 * http://www.woojae.kr
등록일: 2013-03-1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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