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하늘에는 맑은 혼 하나가 떠돌고 있다. 그 혼은 먹구름 낀 날 한라산 꼭대기의 천둥소리로 울다가, 빛 밝은 날엔 백록담 위로 줄을 그으며 날아가는 새의 발자국으로 변하기도 한다. 홍랑으로 알려져 있는 홍윤애란 여인은 죽은 지 이백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고 있다.
홍랑은 귀양 온 선비를 사랑하다 정적인 사또의 곤장에 맞아 죽은 한 많은 여인이다. 그녀는 목숨의 끈을 쥐고 있는 사또가 시키는 대로 “예, 맞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면 살아날 수 있었다. 아무리 고문이 무서워도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던 많은 민주투사들처럼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버텼다. 그래서 그녀는 죽임을 당했다. 태어난 지 백 일도 안 되는 젖먹이를 남겨 둔 채.
공포란 말은 ‘익숙한 곳에서의 낯섦’이다. 쓰나미가 휘젓고 지나간 해변마을의 참상. 정든 거리와 골목에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을 때 느끼는 기분. 곤장 칠십 대를 맞은 다음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려 피범벅이 된 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은 바로 공포의 절정이다. 홍랑은 사또의 동현 마루 그 익숙한 이승에서 낯선 저승으로 떠났다.
홍랑은 정조 원년(1777) 임금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 온 선비 조정철을 사랑했다. 스물다섯에 대과에 급제한 전도유망한 선비인 조정철은 이곳 제주에서 스스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폐증 환자처럼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선비의 아내는 친정이 역적으로 몰리자 삼 년 전에 목숨을 끊었다. 선비 역시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허물어져 살아갈 의욕과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 틈을 비집고 든 것이 바로 홍랑이란 주인집 아씨였다. 홍랑은 남의 눈을 피해 야밤이나 이른 새벽에 선비의 처소를 드나들며 식사와 빨래 뒷바라지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중을 드는 존경의 마음과 받아들이는 감사의 마음이 포개져 두 사람 사이에 그리움이란 긴 강물이 흐르게 된다. 사랑에는 결실이 있는 법, 유배 오 년 되던 해 그들 사이에 예쁜 딸이 태어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귀양살이의 어려움도 사실은 별게 아니다. 그러나 세상 이치에는 호사다마란 게 있어 선(善) 속에는 반드시 악이 끼어들 게 마련이다.
조정철의 집안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신임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귀양 와 있는 선비를 죽일 요량으로 홍랑의 순애보부터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춘향전』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은 소설이나 희곡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지만 제주의 『홍랑전』은 엄연한 실화이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리고 애절한 것이다.
김시구에 비하면 『춘향전』의 변 사또는 그래도 인간적인 사람이다. 기생의 딸 춘향이가 보기만 해도 덜컥 숨이 막히는 절색인데 고을의 사또가 어찌 꼴깍 침이 넘어가지 않겠는가. 취재 중인 여기자에게 성추행을 하고도 의원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우리나라 국회의원에 비하면 열 배, 스무 배쯤 순진하다.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 하고 고함을 지른 변 사또에게 오히려 풍류기를 느낀다면 조금 심한 표현일까. 내가 만일 그 시절 남원 고을의 사또라 해도 춘향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다.
그러나 제주목사는 인정도 사정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그는 ‘유배인들이 다시 임금의 시해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각본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속에 홍량을 집어넣어 혹독한 문초를 하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래서 홍랑은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려 숨을 거둔 것이다. 홍랑은 목숨을 버리고 사랑하는 이를 살린다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도 창에 허리가 찔리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주여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지만 홍랑은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얼굴은 피범벅인 채, 불은 젖가슴은 터질 듯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걸 참아 내게 했다.
홍랑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선비는 홍랑이 죽은 후에도 정의현과 추자도에서 무려 이십이 년간 귀양살이를 했지만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면복권이 이뤄져 선비는 다시 벼슬길에 올라 제주목사 겸 전라방어사가 되어 제주로 돌아오게 된다.
눈물과 회한의 땅 제주, 조정철은 임지에 부임하던 날 관리들의 영접을 마다하고 남성 밖 한내(漢川)가에 있는 홍랑의 무덤을 찾아가 어미 없이 자란 딸과 함께 대성통곡하며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무덤을 단장하고 비를 세운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조정철은 일 년 남짓 제주목사로 있을 동안 외로운 혼으로 떠돌고 있을 홍랑을 위해 한라산 꼭대기 백록담 절벽에 ‘조정철, 정유년에 귀양 와 정술년에 풀려났다’는 통한의 글을 음각으로 커다랗게 새겨 두었다. 선비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백록담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만 다행히 흙 속에 묻히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 홍랑의 혼이 한라산 꼭대기 먹구름 속 천둥소리로 울면서 사랑을 지켜 낸 결실이자 보람이 아닐까. 이래도 사랑이 미친 짓인가.
수필집『풍류의 샅바』중에서 / 구 활 지음: 2012.12월 발행
제목: 사랑은 미친 짓인가 / 구 활
글쓴이: 우재 * http://www.woojae.kr
등록일: 2013-01-2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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